한국재림교회의 슬픈역사.

일본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여 교회를 해산하기로 결정했던 역사를 뒤돌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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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2월에 재림교회에 최태현 목사님을 비롯하여 4명이 종로경찰서에 연행이 되어서

신사참배 및 재림교회 해산과 관련하여 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당시 전체 책임자였던 최태현 목사님은 합회장에서 물러났으며, 오영섭 목사님이 신임합회장이었지만

고문을 가장 심하게 받아서 6월 초에 사망했으며, 새로 추가되어 체포된 김예준 목사님과 나머지 4명이

약 6개월동안 옥고와 고문을 받으시고, 1943년 12월 27일.. 종교해산에 서명을 하고나서

다음날인 1943년 12월 28일에 다섯명이 출소를 하게 됩니다.


위 사진을 보면, 하얀 옷을 입고 있는 분이 다섯분중에 한분인 이성의 목사님입니다.

하얀 옷을 입고 계신 복장도 그렇고, 얼굴의 표정으로 보아하니 위 사진은 아마도 출소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찍은 사진으로 판단됩니다.


그렇다면 1943년 12월 말이거나, 1944년 1월 초로 대충 연대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옆에 있는 분들의 이름, 그리고 장소가 어딘지??

아시는 분들의 조언을 기다립니다.)


일본의 정책중에 대표적인 것은 가장 약하고 규모가 작은 곳부터 굴복을 시킨 다음에 

그것을 시발점으로해서 점차적으로 큰 규모도 굴복을 시키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정책으로 가장 큰 피해를 받은 종파가 우리 재림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당시 기독교중에 가장 규모가 작은 곳이 재림교회와 성결교회였습니다.

재림교회가 해산을 발표한 날이 1943.12.28 입니다.

그리고 성결교회가 해산을 발표한 날이 다음날인 12.29 이라는 것을 봐도 짐작이 가는 부분입니다.


신사참배 역시 동일한 범주에서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다른 종교집단보다 믿음이 약해서 가장 먼저 받아 들인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규모가 가장 작고 영세한 곳부터 작업에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을

(조금만 당시 역사를 공부해도) 깨닫게 되더군요.


이유야 어찌했던지간에 하여간 재수가 없는 것은 사실이고, 기분이 나쁜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이성의 목사님에 대한 자료는 저번에 제가 정리해서 올린 적이 있는데,

필요하신 분들이 참고하시라고, 다시 퍼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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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본향을 위하여 목숨을 맡긴 이성의(李性儀) 목사님 일대기

 

한국재림교회 역사상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해를 고르라고 한다면 1943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의 기독교 억압정책이 정점에 달해 있었고, 그들은 중소규모의 기독교는

해산조치하고 대형 규모의 기독교는 몰아서 1개로 통합시키려고 시도했다.

 

이 당시 일본 재림교회에서도 지도자가 42명이 1943.9.20. 일제히 검거되어

고문은 받지 않았지만, 한국에서는 교회해산이라는 목표가 정해진 상황에서

고문은 물론 목숨까지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한 정책에 의하여 재림교회가 희생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 당시 재림교회 윗분들이

겪어야 할 고초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는 재림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19432월 초에 재림교회의 지도자로 지목된 5명이 종로경찰서로 연행이 된다.

최태현 목사님이 1943. 2.3 오전10시경에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고, 2일 후에

신임 합회장 오영섭 목사, 부합회장인 이성의 목사, 전임회계인 김상칠 씨와

신임회계인 박창욱 등이 연행되어서 1943.12.27. 교회 해산에 서명할 때까지

생사를 넘나드는 고문을 받아야 했다.

 

이 결과 최태현 목사와 이명준 목사가 감옥에서 순교 당했으며, 김례준 목사는

출옥한 다음 4개월 만에, 배경수 목사는 출옥 2개월만에, 그리고 이성의 목사는

출옥 4년 만에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그 당시 일본은 옥사했다는 명예를 주지 않기 위해서 죽기 일보직전에 고의적으로

출소시키는 정책을 고의적으로 펼쳤다.

그래서 옥사하는 사람들보다 출옥 후 사망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던 것이다.

 

오늘은 신앙과 신념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이성의 목사님에 대해서 공부하고자 한다.

(자료가 많지 않아서 연대와 나이 등이 차이가 있을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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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교 100년사(1/오만규) 안에는 이성의 목사 이름이 50번 이상 나온다.

그만큼 한국재림교회에 비중이 크다는 뜻이다.

재림교회사에 비친 이성의 목사의 흔적은 아래와 같다.

 

1912(17) 평안남도 대동군 남형제산면 와우동은 순안에서 30리 밖인데,

6월에 안식일학교 학생수가 30여명이 있었는데, 12월 의명학교를 졸업한 오정순씨가

사경회 겸 전도회를 개최하여 15명의 새 신자를 얻었다. 그리고 그는 학교까지

세워서 교사/전도사로 활동을 했는데, 1915년 봄에 후임으로 이성의 선생이 부임하였다.

 

1917년경(23) 잠시 시조사 편집실에서 근무함

1922(28) 3회 조선합회 총회때 사무원 증명서 받음

1923복음 사역자라는 (영문)책을 편집/번역함

1924년 안식일 오후에 전도지 배포/가정방문을 위한 특별음악회 및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강사 역할을 함

 

1925년 제4회 조선합회 총회때 교사 증명서 받음

1926년 제5회 조선합회 총회때 사무원 증명서 받음

1928년 제6회 조선합회 총회때 전도사 증명서 받음

 

1928.12.25.부터 3일간 서울 동명학교에서 중선미션 교육부 주최로 제1

전국 본 교회 소학교 학생작품 전시회를 개최할 때에 작품 심사위원으로 활동

1930년 제7회 조선합회 총회때 전도사 증명서 받음

 

1931.1월 경성 대전도회(6) 개최, 원동지회장 그릭스 목사가 설교를 할 때에 옆에서 통역을 맡음

1935년 제9회 조선합회 총회때 신임목사 증명서 받음(조선합회 평의원)

1936712(40)부터 약3주간 경성부 신설동에서 천막전도회 강사로 지원

 

1936년 이재만 교장의 뒤를 이어 1937.01에 의명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고 2

교회지남에 취임인사를 올리고, 이사할 준비까지 마쳤으나 합회의 교육개혁에

반대했던 교직원들에게 거절당함으로 취임하지 못함(남선 출신 교역자를 거부하는

움직임도 작용한 듯) 결국 의명학교는 19377월에 재림교회 본부에서 순안지방교회의

유지들에게 무상으로 양도하고 손을 떼기에 이른다.

 

1937.04.12 회기동 본부교회당 날개방에서 조선합회 사역자 양성소를 개교할 때에

교원으로 임명됨. 10회 조선합회 총회 때에 합회 평의원으로 임명

1937년 이시화 목사가 재림교회의 교육사업을 개혁하기 위하여 최태현, 이성의 목사를

대동하여 중국과 일본에 재림교회 교육기관을 시찰함

1937년 교회지남 7월호에 이성의 목사가 일본(도쿄 등) 지역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을 조사해서 시찰여행기를 작성하여 소개함

 

의명학교의 정통은 1938410에 회기동 서쪽 면목동 방향에서 중등학교로

새롭게 출발하게 되는데, 이당시 교장으로 임명되어 경성삼육원 문을 열었다.

(순안의명학교에 비신자 자녀의 입학으로 고초를 겪은 경험으로 인하여 경성삼육원은

신자 자녀만 받는등 교육개혁을 새롭게 추진함)

 

1940(44) 경성삼육원 원장 이성의 목사가 이시화 선교사의 귀국으로 공석이

조선합회 사역자 양성소의 소장 직무까지 맡게 됨(조선합회 교육부장 겸임)

선교사 귀환 및 대총회의 금전적인 지원이 단절되면서 심각한 재정적인 어려움속에

재림교회에 분열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모든 원인을 인물의 부족이라고

주장했지만, 이성의 목사는 인물이 없다고? 아니다. 성신의 지도만 받는다면 누구나

인물이 될 수 있다.”라고 부르짖었다.

 

1941. 11. 26 12회 조선합회 총회에서 중선대회장으로 선출

 

1942년 평강읍 평강예배소를 당시 중서대회장을 맡은 이성의 목사가 교회로 조직함

1943년 종로경찰서로 연행, 1943.12.27. 출소, 4년뒤 고문후유증으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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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목사의 아들이 쓴 글 : 순구자와 순교자의 발자취/이여식/

여호와를 섬길 자로 택하신 나의 선친 이성의 목사

출생: 1896118(음력) 경기도 연천에서 효령대군의 15대 손이신 이진우 씨의 장남으로 출생.

이진우 씨가 먼저 재림교인이 되어 문서 전도까지 함

 

결혼/자녀: 15(1911) 때에 유지형 씨의 차녀 의현과 결혼하여 42녀를 둠

교육: 한성(서울)제일고등보통학교(=오늘날 경기고등학교)에 입학, 성적이 우수하여

일본 유학생으로 선발이 되었으나 거절하고 평안도 순안시골로 내려가서 의명학교를 선택

 

1910년 이후 일본 정부가 순종의 황태자 이 은씨를 일본으로 강제로 데려가서 교육을 시켰는데,

말벗으로 이성의 목사를 지목하여 출세(재물)과 친해 질 수도 있었으나 거절함

장자로서의 재산 상속권마져 동생에게 전부 양보하고 일체 욕심을 내지 않음

의명학교를 졸업하고 재림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함.

영어, 일어를 주로 독학으로 주로 독학으로 익히셨다.

일본 와세다대학을 통신 과정으로 졸업하셨음.

 

미국 선교사(Miss Heaven)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면서 영어를 배웠는데, 그분이 한국말을

배우기전에 목사님이 영어를 먼저 배움

1935년 조선선교30주년 기념식 때 초대된 쿠니야히데 목사가 설교할 때에 훌륭히 통역함.

의명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고, 동명학교장, 삼육원장, 사역자 양성소장 등 교육행정자로서 장기간 봉사하셨음.

 

1943년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어서 고문을 당할 때에 아들 이기돈(박사)(당시 중학생)

누나가 면회를 가서 고문형사에게 맞아서 부러진 이빨을 보았다.

12월말에 출소했을 당시에 심한 구타로 인하여 뇌까지 다치시어 실성하신 분같이 되셨다.

그렇게 병상에서 4년간 신음하시다가 53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본 글은 미주카스타에서 옮겨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