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영혼들에게 참된 양심의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군대라는 무서운 조직에 참여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살인무기를 드는 것을 방관하므로 양심을 더럽히고
진리의 원칙과는 거리가 먼 안식일을 준수하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안식일을 더럽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같은 책임을 교회는 느끼고 회개하여야 할 것이며 에스라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타락과 멸망의 원인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을 순종하지 않으므로
그와 같은 결과가 이르러 온것을 발견한 것처럼 오늘날 교회도 교회의 세속화와
청년들의 타락의 원인이 무엇임을 하나님의 율법을 깊이 연구하므로 양심의 악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다시금 믿음으로 율법의 표준을 높이고 선한 양심을 따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부흥의 물결이 교회에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
개혁은 단호한 결심으로 일어나야 하나 그것은 성령의 깊은 감동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개혁은 깊은 회개와 고백이 동반해야 하며 교단적인 개혁운동이 먼저 일어나야 할 것으로 믿는다.
결코 개인들의 양심의 자유라는 말 따위의 변명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문제는 어느 한두 사람들만의 경험이 아닌 모든 사람들, 아니 전세계의 재림신도들이 당하는 일들에 대하여
아직도 확실한 원칙과 정의를 내리지 않고 개인적인 양심문제라고 말한다면 이처럼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는가?

살인무기인 집총을 하는 일이 말씀과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의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교회적으로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하며, 군대에 참여하여 우리의 원칙과 신앙을 고수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혀 참가유무를 어느 이단 교회와 같이 밝힌 후에 선택은 개인의 양심의 자유에 맡겨야 할 것이다.

아직도 교회는 이와 같은 확실한 원칙과 표준을 제시하지 않은 채
애매한 비무장 원칙을 제시하면서 마치 이 문제는 취사선택의 문제인 것처럼 취급해 버린다.
군대조직에 참여하는 일이 말씀의 원칙과 양심에 문제가 없고
살인무기를 드는 일이 범죄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교회의 앞날은 암담하다.

만약 양심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살인무기를 들고 거룩한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조직 속에서
적당하게 시간을 보내는 기회주의적인 신앙과 행동들이 교회에서 용인된다면 교회에는 희망이 없다.

교회는 영혼들에게 진정한 양심의 자유를 주어야하고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
가르쳐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도
이 자유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기 위하여서였고 또 어떻게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는지를 말씀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 4:18)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요 8:32-33)고 하셨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6-18)고 하셨다.

이처럼 선한 양심을 따라 순종하며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참된 자유인이 아니다.
우리의 선한양심의 자유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존재는 분명 선의 원수일 것이다.
그렇다면 선한 양심을 주관하시는 분은 누구이신가?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선한양심에 의하여 순종하지 않고 양심의 지시를 무시한다면
성령을 거스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요, 결과적으로 사단의 종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순종함을 받는 자에게 종이 되기 때문이다. 죄를 지으면서도 자유를 누릴 수는 없다.
재림교회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모든 영혼들에게 참된 자유와 평화를 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