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연약한 가운데서도 한국교회는 1950년-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나아가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그나마 비 무장전투원의 원칙과 표준을 준수하기 위하여 젊음을 주님의 제단에 바치는 청년들이 없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국 사회에서는 재림교회는 양심적인 평화주의자로 대표되었다.
그러나 1970년-1980년대에 군사정권의 압력이 교회에 가해져 왔을 때 어떻게 되었는가?
신학대학의 운동장이 군사훈련장으로 사용되었다.

재림신문 기획 특집에 실린 S.신학대학 역사교수의 글을 이용해본다.

“20여년전만해도 한국사회가 인식하는 대표적인 양심적 집총 거부자들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청년들이었다.
그런데 지난 20여년동안 한국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의 양심적 집총거부는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군사 독재 정권의 탄압에 한국재림교회가 굴복한 중요한 사항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이제 한국 사회는 한국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를
더 이상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대표하는 평화 교단으로 기억하지 않고
오히려 ”여호와 증인“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대표하는 평화 교단으로 주목하여
그들에 대한 법률적 배려를 토의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역사적 추이를 찹찹한 느낌으로 바라보고 있는 재림교인은 비단 ㅇㅇ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결과에 대하여 놀랄 필요가 없다. 아니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는 무엇인가? 원칙과 양심을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1865년3월7일자의 리뷰 지에 공개한 우리의 원칙과 신조를 다시 찾아야 한다.
우리는 비무장 전투원이 아니라 어떠한 전쟁과 폭력, 그 것을 목적으로 하는
어떤 단체에도 가담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양심이요, 원칙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전쟁을 실례로 들어 전쟁의 참여를 정당화하려고 할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화잇 부인의 어떤 글을 이용하여 반론을 제기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은 무엇이 더 순결한지 또 무엇이 우리의 원칙이 되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미국남북 전쟁 당시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신약시대에 와서 가장 명분 있는 전쟁은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일어난 미국 남북전쟁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명분 있는 전쟁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지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어 있는 그분의 백성들이 이 난처한 전쟁에 가담할 수 없음을 보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모든 신앙상 원칙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그들은 진리에 순종하면서 동시에 상관들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 …

심령 속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은 영이요 생명이므로,
그들 속에는 굴복하게 하고 순종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여호와의 십계명은 모두 의롭고 선한 법률의 기초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는 자들은 국가의 모든 선한 법률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만일 통치자들의 요구가 하나님의 율법과 상치될 때에는, 우리가 가부간 결정해야 할 유일의 문제는
하나님께 순종할 것인가 사람에게 순종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1증언, 361-362

우리는 비무장이 아니라 절대 ‘평화주의’ 가 우리의 원칙인 것이었다.
1865년3월7일자의 리뷰 지에 공개한 우리의 원칙과 신조는 아직도 진리이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마지막 선지자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었더라면 재림교회 안에는 새벽이슬과 같은 재림 청년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을 환하게 하였을 것이다.

누가 총칼이 무섭지 않으며 감옥의 음침한 곳을 좋아 할 것인가?
누가 가난하게 되기를 원하며 좋은 직장을 갖기를 원치 않겠는가?
누가 매맞는 일이 즐거운 일이며 조롱과 비웃음이 두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국가보다 우선하여 충성해야 곳이 있으며 분명한 말씀이 있고
선지자의 증언이 있건만 재림교회는 매우 지혜로운 방법으로 그 말씀들을 져버렸다.
군대 문제는 개인의 자유이며 양심적인 문제라고 말하므로 허물과 죄는 개인에게 돌려버리고
교회는 순결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이왕 여호와증인 교회의 말이 나왔으니 한번 비교해 보자.
그 청년들을 강제적으로 군대에 가지 못하도록 교회가 감금하였는가? 그래서 그들은 군대에 가지 않았는가?
그들은 강제적으로 감옥에 들어가도록 교회로부터 협박을 당하였는가?
그래서 그들은 어쩔수 없이 감옥에 들어갔는가? 아니다.
그들은 양심과 개인의 자유에 의하여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다만 무엇이 원칙이며 올바른 양심인지를 교회는 가르쳤을 것이며
그리고 양심의 자유를 누리도록 청년들에게 믿음을 도와주는 일을 하였으리라 생각한다.
양심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이들의 생각이 옳았고 그리고 또 양심의 참된 자유를 누리고 있다.

재림교회도 이와 같은 양심의 자유를 청년들에게 주었어야 하였다.
그러나 재림교회가 청년들에게 허락한 자유는 무엇이었는가?

언약궤를 매어야할 어깨에 총칼을 메는 자유,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군사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자유,
금요일 해는 서산에 넘어갔으나 목욕은 커녕 땀이 범벅이 된 채 상관의 명령을 순종해야 하는 자유,
안식일 아침은 밝았으나 그들은 안식을 누릴 수 없어 당황하는 자유,
그리고는 한 두 시간 짬을 내어 말씀을 보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자유,
성경과 증언의 말씀과는 거리가 먼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자유를 준 것이다.

이 자유가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인지 교회는 깊이 반성해야 한다.
1923년 재림교회의 결정이 옳은 판단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교회의 모든 교인들이 그들의 양심의 확신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지 그들의 조국을 섬길 수 있는 절대적인 자유를 허락한다.” 스위스, 글랜드, 1923년 1월 2일

“우리는 각자가 이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양심을 따라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의사록, 36
(대총회장 다니엘스의 발언)

양심의 자유라는 말을 함부로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
양심의 자유라는 말을 왜 군대문제에만 적용하는지 반문하고 쉽다.

양심의 자유는 교회가 줄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이미 주신 자유인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던지 우상을 섬기던지 그것은 인간의 양심이요 자유이다.

선택의 자유는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유일하게 인간에게 주신 특권이다.
하나님께서는 강제적으로 무엇을 하지 않으신다.
분명히 우리는 하늘에서 루스벨이 행한 것처럼 불순종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영원한 손실을 거두게 될 것이다.
양심과 선택의 자유라는 말을 혼돈하여 재림교회는 전쟁에 대한 말씀의 원칙을 버리고 말았다.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는 개인에게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쟁에 참여하는 자유는
영원한 손실을 당한다는 사실을 말해줄 의무를 교회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십계명을 순종하는 것과 불순종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의 자유이지만
교회는 불순종하는 자를 교인으로 용납할 수 없는 원칙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군대문제를 개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맡기는 일은 총칼을 들고 전쟁을 하든지, 사람을 죽이든지,
안식일을 잘 지키던지 지키지 않던지, 방화를 하든지, 재물을 약탈하든지, 전쟁이나 군대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는
교회는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심의 자유이니 각자가 알아서 하라는 말이다.

양심의 음성을 듣는 일은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이요 순종하는 것이다.
여호와 증인 교회의 청년들은 유사시 전쟁을 목적으로 조직된 군대에 참여하는 일을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나아가 살생을 목적으로 하는 총 칼을 드는 일을 양심으로 거부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느끼는 양심의 소리를 재림교회는 정녕 듣지 못하는가?
모든 재림신자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우리들의 양심이 그들보다 깨끗지 못하다면,
재림 교회의 양심과 믿음이 그것이라면 재림교회의 장래에 무엇을 기대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보다 더 좋은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할는지 모른다.
그들은 안식일도 지키지 않고 돼지고기도 먹고 예수님을 피조물로 믿고
그들의 진리는 구원이 없는 진리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그렇다. 분명 우리가 믿는 진리는 확실하며 분명한 진리이다.
그들의 믿는바 진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진리를 우리는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가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소위 이단 교회로 낙인 받은 그들의 양심보다 깨끗지 못한 양심으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의 양심이 변화되어야 한다. 과거에 세웠던 진리의 원칙을 교회는 다시 회복하여야 한다.
그때 진리는 우리들의 믿음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 할 것이요, 청년들의 양심은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될 것이며
어떠한 환경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은 믿음을 가진 청년들이 탄생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바랄만한 것이 아닌가?

인간의 법률에 의하여 하나님의 율법이 짓밟히는 군대사회는
마치 인간의 양심을 억압하여 일요일을 지키게 하는 일요일 강제법령의 축소판과 같다.
그러나 일요일 강제법령에 비교도 되지 않는 작은 시험에(군대와 전쟁)
우리의 양심이 타협하고 머리를 숙인다면 어떻게 그 큰 날에 승리할 수 있겠는가?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 하겠느냐”(렘 12:5)

우리들의 양심은 말씀에 의하여 더욱 예리하게 다듬어져야 하며
우리의 믿음은 뜨거운 불에 연단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게 무엇이 옳은지를 제시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어 있는 그분의 백성들이 이 난처한 전쟁에 가담할 수 없음을 보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모든 신앙상 원칙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그들은 진리에 순종하면서 동시에 상관들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

거기에는 계속적으로 양심을 어기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의 원칙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다. 그들은 다른 원칙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세상의 방침과 여론은 그들을 지배하는 행동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들로 하여금 선행(善行)의 형식을 취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와 같은 동기에 의하여 지배될 수 없다.
심령 속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은 영이요 생명이므로, 그들 속에는
굴복하게 하고 순종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여호와의 십계명은 모든 의롭고 선한 법률의 기초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는 자들은 국가의 모든 선한 법률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만일 통치자들의 요구가 하나님의 율법과 상치될 때에는, 우리가 가부간 결정해야 할 유일의 문제는
하나님께 순종할 것인가 사람에게 순종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1증언, 361-362

"땅에서 나온 권세들이 매우 강렬하게 격동하고 있다. 전쟁과 유혈이 그 결과이다.
도덕적 분위기는 잔인하고 몸서리쳐지는 일들로 오염되어 있다. 투쟁의 정신이 확산되고 있다.
그것은 도처에 편만하다. 많은 사람들이 사기의 정신과 공명정대하지 않은 관계에 사로잡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그들은 어떤 영이 그들을 사로잡았는지 분별하지 못한다."8증언, 248-249

"사단은 전쟁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전쟁은 사람의 가장 악한 감정을 자극하며
전쟁의 희생자들을 죄악과 유혈 속으로 영원히 쓸어 넣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라가 다른 나라를 대적하여 싸우도록 자극하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날에 설 준비를 갖추는 사업에서 떠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쟁투, 589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공사(公私)간의 범죄가 이 금령 안에 포함되어 있다.
여덟째 계명은 유괴(誘拐)와 노예 매매를 정죄하고 정복을 위한 전쟁을 금하고 있다.
이 또한 절도와 강도 행위를 정죄한다."부조, 308-309